대부

대부는 2대에 걸친 마피아조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부는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는 조직 내부의 모습과 조직을 합법화 시키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회의 모습을 교차시켜 보여준다. 이탈리아 마피아들이 자리잡기 시작하는 미국 사회는 비리로 얼룩져 있다. 꼴레오네가는 당연히 정치가들을 포섭해야 하며 그들에게 의지해야 한다. 또한 다른 마피아 조직들과의 파워게임에 조율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꼴레오네가는 굉장히 가정적인 집안이다. 그리고 그들은 현대에 와서 테러나 총질보다는 정치인과 교묘한 법의 이용을 통해서 거대 조직으로 성장해 갈 수 있는 것이다.
대부는 그러나 이러한 사회와의 밀착을 정면으로 들이대지 않고 가정사적인 이야기로 영화를 풀어나간다. 2부에서는 로버트 드니로가 나와서 가난한 이탈리아인이 어떻게 갱단의 보스가 되어 가는지 보여주며 1부에서는 알 파치노가 대학을 졸업하고 2차세계대전에까지 참전하는 등 자신의 가정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장면 장면에 보여지는 꼴레오네가의 대외적 모습들은 처절하다. 큰아들 소니가 상대편 갱단에게 테러를 당해 온 몸이 난사당하여 즉사하고, 대부 돈 꼴레오네 역시 과일을 사러 가다가 테러를 당한다. 적은 같은 부류인 갱단으로써 경찰과 절탁되어 있다. 그리고 내부엔 배신자가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대부는 한 이탈리아인이 거대 조직을 일궈 나가는 과정을 가정사적인 내부의 모습부터 과장되지 않게 보여줌으로써 마피아 조직을 둘러싼 미국 사회 전체를 조망하게 한다.
아버지 돈 꼴레오네가 죽은 후 막내아들인 마이클 꼴레오네가 조직을 이어받는다. 아들 역시 유약한 청년인 것 같았으나 과감한 결단력과 좋은 머리로 조직을 키워나간다. 아무리 좋은 양복을 입고 돈이 많고 교양이 있더라도 이익을 쫓는 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그 세계의 생리이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만들어 간 쿠바의 혁명 속에서 마이클 꼴레오네는 배신과 음모 속에서 또다시 제갈길을 찾아간다. 결국 합법성을 띤 조직을 만들어 내세우는 게 마이클의 최대 목표이리라. 그러나 또 다시 테러가 일어나고 그가 가장 사랑하는 딸이 죽고 만다. 울부짖는듯한  그의 모습 속에서 그가 사주한 많은 살인사건들이 잠시 떠올랐다. 그런데도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마이클을 보며 그에게 동정심이 가기도 했다. 이 비정한 서정은 대부라는 영화의 또다른 맛이기도 하다. 일찌기 배신한 그의 친형도 제거해버린 마이클이 아니었던가. 형 프레도는 자신을 동생이 용서한 줄 알았지만 마이클은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오직 조직의 생존과 팽창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이라면 무엇이건 망설이지 말아야 하니까.

by 달빛부름 | 2008/12/01 12:31 | 영화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소오강호

소오강호는 김용의 다른 소설들처럼 역사적 배경이 그리 크지 않는 소설이다.
소오강호의 무림시기는 명대 중반 정도로 생각되는데 국가적으로 안정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무림도 르네상스를 맞이할 만한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국가가 존망에 처해 있을 때일수록 영웅이 더 등장하는 법이지만 국가의 안정된 기틀아래 파벌의 융성은 더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소오강호는 무림자체내의 배경을 전제로 정파 내부-오악검파의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기도 하다.

주 인공 영호충은 화산파의 1대제자로써 사부 악불군을 아버지처럼 섬기고 있다.  영호충의 성격은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만나서도 차별을 두지 않으며 의롭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영호충은 사마외도의 사람이라도 이해해주고 수용하는 면이 있다. 또 사람 자체가 호쾌한 면이 많아서 고지식하지도 않다. 영호충은 마치 금분세수하며 물러나려는 유정풍과도 같은 면이 있다. 유정풍은 곡양이라는 마교 장로와 음악을 바탕으로 사귀게 된다. 이들의 우정은 매우 깊어 둘은 오악검파의 정파 인사들에게 궁지에 몰려서 죽고 만다.

그 렇다면 오악검파는 어떤 파인가. 이들은 물론 정파다. 화산 형산 등등 중국의 오대산에 자리잡은 명문파이며 특별히 검하고 연관이 깊다. 그런데 이들 오악검파 중 숭산파는 세력이 가장 막강하여 오악검파를 하나의 파로 통합하려고 한다. 이러한 야심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개되는데, 영호충의 사부 악불군의 속마음도 실은 숭산파의 맹주 좌냉선의 야심보다 못하지 않다.

영호충과 악불군은 대조를 이룬다. 영호충은 호탕하고 때론 지나칠 정도이나 악불군은 선비형의 깔끔한 인물이다. 둘다 색을 탐하지는 않지만 영호충은 말술을 즐겨하지 않던가. 영호충은 사마외도라 하여도 그닥 차별을 두지 않지만 악불군은 그 성격이나 장문인의 지휘도 있고 하여 사마외도와 가까이 하지 않는다. 영호충은 색마 전광렬과도 통쾌하게 술을 마실 줄 알지만 악불군은 그런 이들을 경멸한다. 물론 영호충은 의림을 구하기 위해서 전광렬과 목숨을 결고 싸우기도 하니 정의로운 면을 절대 버리지는 않는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악불군에겐 두 개의 다른 마음이 있으니 저런 영호충이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말이다.

우리는 악불군이나 좌냉선을 이해해 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한 파의 장문인의 신분은 다른 밑에 사람들과 달라서 그 파의 중흥을 꾀하며 개인적인 야심도 물론 강하겠지만 자신의 자리를 통해서 세상을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영호충은 그저 제자일 뿐이니 한바탕 무림을 유랑하기도 한다. 기연을 만나 독고구검을 배우기도 하는데 풍청양 같은 이가 어찌 장문인들에게 독고구검을 전수해 주겠는가. 콧대만 쎄고 속과 겉이 다른 이런 부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풍청양은 말하기도 한다.

오악검파 내의 숭산파의 물불을 안가리는 야심은 오악검파를 분열시키고 서로 싸우게 만든다. 이런 싸움속에 인간이 얼마나 추악할 수 있는지 가끔 섬뜩한 순간이 오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영호충은 순수하니 괜찮기도 하다. 그에겐 그렇게 속과 겉이 다른 야심이 없는 젊은 청년이니 그렇다. 그리고 그는 마교 전교주 임아행을 도와 마교교주 동방불패를 같이 잡을만큼 정파와 사파를 흑백논리로만 받아들이지 않으며 상문천같이 홀로 싸우는 영웅을 위해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한다.

이런 영호충의 모습은 어떨 땐 호쾌한 면이 소봉같기도 하고 어쩔 땐 장무기같기도 하다. 소봉은 천생신무라 처음부터 너무 강하게 나오지만 영호충은 그렇지가 않다. 이러저리 휩쓸려 다니기도 하면서 당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영호충의 이런 모습은 좀 더 아기자기하여 정이 가기도 한다. 그래도 아마 주량은 소봉이 더 쎌 것이다. 그리고 여자들 속에서 우유부단한 마음을 갖는 것은 장무기와 비슷한 점이 있다. 장무기처럼 아주 어려서부터 갖은 고난을 겪지 않은 것은 영호충의 행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영호충은 거의 끝까지 악불군이라는 스승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소봉이나 영호충은 그래도 비교적 안정된 유소년기를 보냈지만 장무기는 그렇지 못했으니 어쩔 땐 장무기가 더욱 존경스럽기도 하다. 헌데 장무기와 영호충이 가는 길은 좀 비슷한데가 있었다. 둘다 명교,일월신교의 스카웃을 받는 것이다. 물론 장무기가 명교의 교주 자리에 오를때는 어느정도 필연적인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고 있었지만 영호충은 일월신교의 교주가 되는 것도 항산파의 장문인이 되는 것처럼 하나의 작은 지나치는 과정으로 치부했을 뿐이다. 그것보다 임영영이라는 소녀가 영호충에겐 더 큰 존재였을 것이다.

소 오강호는 유정풍이나 영호충같은 이들 대 악불군이나 좌냉선 같은이들을 교차시키면서 후자들의 비열한 야망을 더욱 부각시키기도 하는데  오악검파가 큰 문제가 되었을 뿐 모든 정파가 다 그렇다고 보진 않았다. 또한 일월신교 내에서의 동방불패나 그의 짝 양련정의 행동들, 그리고 임아행의 대처하는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사실 정파나 사파나 그 추악함은 비슷하기도 했다. 사파는 사파이니 그렇다 하지만 정파가 그렇게 추악하다면 이건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무림제패의 야심은 차라리 무림인들의 본능이라고 봐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본능이 사라질 때 누가 규화보전을 고자가 됨에도 배우려 하겠으며 항상 무공을 연마하겠느냐 말이다.

독고구패는 그런 점에서 반어적인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즉 독고구패역시 승부 속에서 영원한 일등을 차지했지만 좌냉선이나 악불군처럼 무림의 사회적 지휘를 등에 지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위에 올라서서 군림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파를 최고로 만드는 것등은 독고구패가 전혀 염두해 두지 않았던 점이다. 양과처럼 외로운 영혼도 그래서 독고구패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독고구패의 본능과 악불군,좌냉선,동방불패,임아행 등의 본능은 서로 다르다는 것인가?? 규화보전을 만든 환관 역시 황제가 있는 궁에 묶여 있으니 무림을 제패하려는 야심은 없었을 것이다. 황제를 위해서 무림을 제패해 주려 햇을지도 모르지만 환관이나 독고구패에겐 무공 자체만에 몰입하는 외롭고도 좁은 문이 보인다는 점이다.

영 호충은 사부 악불군과 같은 야심도 없는 마당에 천하제일의 독고구검을 배우지만 양과만큼 독고구패를 마음속으로부터 이해하진 못했으리라. 유정풍이 곡양과 소오강호라는 노래를 부르며 저 세상으로 갔듯이 진정한 무공의 맛은 독고구패나 환관처럼 결국 스스로에게 가는 길이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진실할 수 없다면 어찌 참된 우정이 싹트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유정풍은 곡양을 굳이 부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어찌 대의를 위해서 한 목숨 받치지 않으랴만은 대민의 위에 서기 위해서 사욕을 채우려는 자들이 있다면 이건 정말 유정풍같은 사람들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호충이 임영영을 사랑하는 것이나 장무기가 조민을 사랑하는 것 등은 어찌 보면 대의에서 벗어나는 면이 있다. 사랑은 국경도 없다는 명언이 이들을 변명해주고도 남지만 왜 하필 영호충은 의림을 장무기는 주지약을 사랑하지 않고 항상 가시가 있는 장미를 택했을까. 일월신교 교주 임아행의 딸 임영영은 영호충을 위해서 소림사에까지 투신하기도 할만큼 의리를 아는 여자이기도 했지만' 장무기가 적이엇던 몽고여자 조민을 사랑한 것은 장취산이 굳이 사파의 은소소를 사랑한 것과 비슷하기도 한데 그런 은소소마져도 자신의 아들에게 '여자는 믿어서는 안된다'고 그녀 스스로가 말했으니, 역시 사랑은 미로인가 보다.

여담이었고, 결국 오악검파는 분열되고 좌냉선과 악불군 등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임아행이 북치고 장구치며 화산정상에 올랐지만 오악검파는 한 줄기 바람에 실려가는 조각구름과 같이 되어 버렸으니 이 야망또한 어찌 허망치 아니 하겠는가.
이 허망한 분위기에 소오강호라는 비운의 곡조가 흐르면 참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유정풍과 곡양이 죽음을 함께 나누면서 불렀던 그 장면은 소설 초반부에 큰 감동과 충격이었다. 어쩌면 이 소설 전체는 그 소오강호의 변주곡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순수한 마음, 순수한 우정은 정파와 사파의 경계도 초월하지만 추악한 야심은 안정된 명대의 르네상스와도 같은 오악검파라는 명문정파들을 낭떠러지로 떨어뜨리기도 하며' 정파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겉과 속이 다른 이러한 모습들은 가면 갈수록 위선의 냄새가 나서 나중엔 '하나의 존재가 어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속되지 않았는데 속에서는 언제부터 이렇게 악취가 났던가'하면서 그 차이에 독자는 가슴이 싸늘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추구했던 야망의 정상도 실은 허망한 것임을, 순수한 우정은 가슴 속에 남아 이렇게 음악으로 흐르는데, 임아행의 야망 그것은 찬바람의 횡함뿐이니 우연일지언정 허탈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얼마 전에 좌냉선과 악불군은 비참하게 죽지 않았는가 말이다. 차라리 임아행 대 좌냉선 또는 임아행 대 악불군 했으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나 이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 더 할일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주제는 다음 12자로 요악할 수 있다

'금분세수 오악검파 소오강호'

['금분세수' 할 정도로 평화로운 시기에 한족의 5대명산에서 '오악검파'라는 정파의 꽃들이 피었으나 '소오강호'를 불렀던 유,곡 두 사람의 정,사파를 초월한 순수한 우정앞에 오히려 심히 부끄럽구나.']


- 소오강호에는 김용의 역사의식이 잘 드러나있다. 김용은 항상 한족의 역사를 옹호하는 편이었는데 소오강호에서는 반대로 그 분열상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듯 하다. 한족의 명은 인구수도 100배나 적은 청에게 망할 수 밖에 없었는가? 소오강호 당시의 역사시기는 명중후반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안정된 시기에 짙은 분열을 경험하는 무림을 통하여 김용은 왜 한족의 나라가 오랑캐에게 망하는지를 되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by 달빛부름 | 2008/12/01 12:30 | 김용무협 | 트랙백 | 덧글(0)

의천도룡기[비극성으로본사조삼부곡]

우리가 김용 작품에서 자주 놓치는 것이 의외로 '비극성'이다.

'비극성'을 왜 놓치느냐고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실은 김용 작가분한테 따져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김용 작가분이 소설을 너무 재밌게 아기자기하게 써 주시기 때문이다.

 

곽정의 비극성은 금나라에 짓밟혀가는 조국, 송이 망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곽정의 아버지 곽소천은 무공을 익힌 자로써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충의로운 자였다. 무엇보다 곽소천은 뼈대깊은 한족의 자손이었다. 곽정은 망해가는 조국의 한을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을 시작으로 짊어지고 가야 할 자로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다. 즉 태어날때 부터 비극을 품고 태어난 것이다. 이런 곽정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 역시 한맺힌 조국이 아니라 한족이 항상 멸시하면서도 수도 없이 침략당했던 오랑캐의 땅이었다. 물론 몽고가 직접 침략을 개시할 시대는 곽정이 나이 들어서 이지만 말이다. 곽정은 커가면서 중원무림에 발을 들여놓고 구처기와 강남칠협의 뜻을 받들어 자라난다. 이들은 모두 애국지사들이며 곽정은 무공에 있어서 대성하지만, 유년시절을 보낸 몽고에 대항하다 전쟁 속에서 죽고 만다. 하지만 곽정이 사건 속에서 줄곧 조국의 한과 함께한 것은 아니다. 곽정은 황용과 사랑했고, 악인들과 결투했으며, 진정한 대협으로써 몽고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은 중년에 들어서부터이다. 당장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인간무협사의 비극성을 뺀다면 곽정은 그래도 행복하게 살다 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양과에 들어서면 양과 스스로가 느낀 조국의 한은 훨씬 줄어든다. 양과 역시 양강이라는 조국을 배반한 자의 자식으로써 생래적인 비극성이 있지만 양과의 비극성은 곽정의 그것처럼 시대적 배경이 큰 것도 아니요,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양과의 비극성은 시대가 낳은 사생아의 사적인 이야기이다. '신조협려'는 곽정의 그것보다 훨씬 더 양과의 내면에 촛점을 맞춘다. 양과의 어린시절은 오기로 가득 찬 외로운 것이었고, 오해투성이이다. 그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계속 살아가며, 그럼으로 인해서 끝없이 방황하고 사건을 유발시키는 단초를 제공한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살며 사랑을 원치 않는다고 외치지만 또 사랑을 갈구하기도 한다. 시대의 배경은 훌쩍 뒤로 물러서고 양과라는 개인의 방황과 좌절과 반항이 가슴 깊이 묻어나게 된다. 양과가 소용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뜨거운 불이 차가운 얼음을 사랑하는 것과 같기도 하고 채우려고 애쓰지만 채우지 못한 영혼이 채우려고도 하지 않는 영혼을 사랑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양과에게 어울릴 여자는 양과를 한없이 이해해줄 수 있는 따듯한 여자여야 하는데 소용녀는 백치에 가까운 순수한 여자가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결국 사랑한다. 이는 양과가 방황과 반항을 거듭하면서 세상에 저항했던 것이 결국 자신의 완성을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소용녀가 양과를 포용한 것이 아니라 양과가 소용녀를 포용했던 것이다. 백부의 딸에게 한 팔이 잘리고 독고구패라는 희대의 고수의 무공을 배우며 무공에 있어서도 일인자가 된 양과이지만 소용녀와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게 된다. 양과의 무공 역시 자기 완성을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장무기의 비극성은 곽정보다 훨씬 더하다. 그는 온 무림을 피바다로 만든 사손의 조카요, 정파와 사파의 피를 한 몸에 받은 몸이다. 그 전에 있었던 처절한 사건의 깊이로 볼때, 장취산과 은소소가 섬에서 다시 배를 타고 중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장무기의 일생은 비극으로 점철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장무기의 어린 시절은 중원으로 온 이후 고통 그 자체가 되고 만다. 어린 장무기는 그러나 불의에 목을 내놓을 망정 지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소년이다. 젊은 청년이 되기까지 장무기의 고통스런 시절은 섬에 있을때의 백부와 부모에게 받았던 사랑과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배반의 연속이요 그 속에서도 스스로와 가치를 지켜나가려는 몸부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장무기의 인생은 자신 스스로의 인생이 아니요, 무림속에 반드시 자리잡아야 할 중심적인 인물로 성장하게 하는 필연성의 비극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결국 그는 명교의 교주가 되지만, 그의 인생은 여전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요 세상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장무기가 주지약과 조민 사이에서 우유부단해 하는 것 역시 그런 면이 다분하다. 왜냐하면 조민은 몽고 여자요 중원무림을 핍박하는 여자이기 때문이며 주지약은 아미파라는 명문정파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무기는 역시 대의를 잃지 않으며, 곽정의 대의보다는 훨씬 더 능란하게 대처하는 점이 있다. 장무기는 황용이 필요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장무기는 일생을 거대한 사건과 대의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길고 긴 시대의 비극은 '주원장'이라는 명의 태조로써 막을 내린다. 시대의 비극성으로 봤을 때 김용의 사조삼부곡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셈이다. 그리고 양과의 '신조협려'로 오면서 시대를 잊고 양과라는 개인을 느끼면서 잠시 쉬었던 느낌이다. 역시 양과는 양강이라는 배반자 아버지를 둔 잃어버린 세대,잃어버린 시대,잃어버린 시절의 허망함과 편안함이었다. 이어 장무기의 '의천도룡기'에선 치열한 사건들 속에 다시 한번 함몰했던 기억이 난다.

 

 

곽정은 양양성에서 전사했지만 양과나 장무기보다는 훨씬 더 고뇌가 적었고 크게 고뇌할만큼 복잡한 심리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결국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다 간 사람이다. 양과는 복잡한 인물이지만 알고 보면 자신을 이해하려는 과정속에 있었던 사람이요, 스스로를 고민했을 뿐인 사람이므로 소용녀와 사라져간 것으로써 행복을 찾았다고 볼 수 있다. 장무기는 양과처럼 스스로를 고민하려는 시기가 오기 훨씬 이전부터 사건의 틈바구니 속에서만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사건의 비극성을 이겨낸 인물로써 승리자이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붓을 떨구고 홀연히 떠날 수 있을만큼 홀가분한 인물이기도 하다.

by 달빛부름 | 2008/12/01 12:29 | 김용무협 | 트랙백 | 덧글(0)

사조영웅전[곽정과황용의사랑]

곽정과 황용은 우연히 만나 서로 좋아하게 된다.
곽정은 뜻이 있어 중원에 나서지만 황용에게 무림은 크게 의미가 없는 곳이다.
황 용의 아버지 황약사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다. 그는 이인으로 아내를 잃은 후 더욱 외곬이 되어버린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비범한 인물이다. 황용의 외로움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외딴 섬에서 아버지와 함께 자랐다는 점도 있지만 아버지의 천재성을 이어받은 예민함에 기인하기도 한다. 황용은 아버지에게 배워 송의 문화에 대해서도 이해가 밝다. 그런 황용과 과묵하고 담대하며 약간은 우둔한 곽정의 만남은 어딘가 반대가 서로 끌린다는 옛사람의 말에 일치하는 데가 있다. 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소설의 전편을 함께 한다.
우리는 이 소설 속에서 많은 사건과 마주치게 된다. 구양봉이라는 집념이 강하고 머리가 뛰어나지만 시시때때로 자신을 위해 얼마든지 악랄해 질 수 있는 인물도 나오고 양강이라는 저열하고 비극적인 인물도 나오며, 홍칠공 등등 암튼 많은 일들이 소설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곽정과 황용의 동행은 그 사건들 속에 함몰되지 않았다. 이들의 순수한 사랑은 사건과 함께 하기도 하지만 사건을 뛰어넘지도 사건 속에 휘말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들은 한편의 쓸쓸한 중원 유람을 하고 있는 듯 하다. 곽정과 황용이 밀실에서 구양봉에게서 얻은 내상을 치유하고 있을 때도 그들은 거기에 있고 다른 등장인물들은 서로 지나치고 흘러간다. 곽정과 황용은 때론 사부가 때론 아버지가 걱정되어 그 곳을 찾아가지만 이내 사건은 풀려지고 그들은 또 다른 갈 곳을 향해 간다. 황용이 곽정에게 정말로 화쟁과 결혼할 거냐고 물으니 곽정은 약속이니 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황용을 더욱 사랑한다고 말한다. 황용은 이내 쓸쓸해지며 오빠와 헤어지면 난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곽정이 화쟁에게 이제 굳이 갈리가 없는데도 황용은 재차 사랑을 다짐받으려 하고 둘의 동행은 따듯하면서도 왠지 쓸쓸하다. 조국이 기울어가고, 곽정은 아버지가 없으며 황용은 어머니가 없으니, 인성이 그리 행복할 리는 없다. 또한 도화도주 황약사는 외딴 섬에 홀로 살면서도 딸의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소설의 끝자락에 큰 사건이 터지고 만다. 강남칠괴, 곽정의 부모격인 사부들이 살해되고 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범인이 황약사로 지목된다. 곽정은 황용 앞에서 불같이 노하고 만다. 황용의 가슴은 무너지고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황용은 그렇게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영민한 머리로 사건의 전모를 밝혀 내고, 결국에 둘은 헤어짐을 이겨낸 새로운 사랑을 발견하게 되니까.
이렇게 사건 일변도의 무협소설에서 사건이 인성을 가리지 않고 물 흐르듯이 흘러 가는 것, 마치 시냇물이 시냇가에 핀 꽃을 적시되 결코 꺽지 아니 하는 것, 그리하여 다시 읽어보니 사건도 사건이려니와 순수하고 쓸쓸한 사랑이 다시금 가슴 깊이 묻어나게 하는 것, 그 원인은 남자답고 과묵한 곽정이라는 인물에게도 있지만 전신인 아버지 황약사를 닮은 비범한 머리, 비범할수록 왠지 평범한 이와는 다른 감수성,그리고 어머니 없이 외딴 섬에서 자란 여자아이의 나이에 맞지 않는 깊은 외로움-황용이라는 인물에게서 더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그녀가 더욱 의지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을 곽정이 아니고서 그 누가 진실하게 받아줄 수 있겠는가. 이들의 사랑 하나도 이렇게 깊은 데가 있어서 강함과 약함이 엇갈리는 단순 무협의 사건은 배가 풍경을 스쳐 앞으로 가듯이 앞에서 기다리다 이내 뒤로 사라진다.

명작은 오래될수록 더 깊은 맛이 우러나는 것 같다. 오랜 후에 다시 읽은 좋은 소설은 무엇인가 무지를 깨우치게 하는데, 그 사건보다는 그 인물들의 인성과 관계를 깊은 곳까지 이미 그 소설이 품고 있었음을 독자는 처음에 잘 알지 못했던 연유다.

by 달빛부름 | 2008/12/01 12:27 | 김용무협 | 트랙백 | 덧글(0)

부활

톨스토이의 부활은 예술적 성서라고까지 칭송된다.
그러나 부활은 19세기 제정러시아의 모든 면을 고스란히 작품 속에 투영시킨 사실주의의 걸작이다. 이것은 네흘류도프의 정신적 행보와 같이 전개되는데 그의 갈등과 선택 그리고 의무가 희생의 빛을 담게 되니 성서라 불리게 된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순수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를 타락시킨 것은 군대였다. 귀족이었던 그는 많은 재산을 상속받게 되어 있었고 귀족자제로써 당연히 거쳐야 할 군대를 가게 된 것이다. 당시 러시아의 사회상은 무너져가는 왕권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럽 여기 저기서 근대화가 이루어져 서로 협력과 반목을 번갈아 하던 시대이다. 왕권이 부실하니 귀족들도 정체성을 잃고 혼란해 할 시기다. 네흘류도프는 이렇게 군대를 가기 전까진 순결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도 남들처럼 출세의 길을 가야했고, 그의 고모댁에 양녀 겸 하인으로 있던 카츄샤를 만나게 된 것은 그가 군대를 가기 얼마전의 일이다.
카츄샤는 네흘류도프의 고모댁 하녀가 낳은 사생아다. 이를 불쌍히 여긴 네흘류도프의 고모 소피아가 그녀의 대모가 되어 준 것이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 네흘류도프는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카츄샤를 범하고 만다. 그리고 홀연히 군대로 떠나게 된다. 그렇게 시간은 망각속으로 흘러갔다.

군대를 제대하고 재산을 물려받아 굉장한 부자가 된 네흘류도프 공작은 어느 날 법원으로부터 배심원으로 참석해 달라는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그는 사회에 대한 의무와 호기심에 이끌려 법정에 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카츄샤를 발견하게 된 것인다. 처음엔 그녀가 아닌 줄 알았다. 오래된 기억속에 그녀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가 살인죄의 누명을 뒤집어 썼으며, 그렇게 그녀가 타락하게 된 이유가 자신이 그녀를 탐하고 잊어버린 후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갖고 고모댁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오래 전에 잃어버린 정신의 젊음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네흘류도프는 카츄사를 구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카츄샤 같은 서민들과 네흘류도프같은 귀족들의 생활, 그리고 법정의 모습 등 또한 이제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게 되는 카츄샤를 힘써 도우지 않으면 안되는 그의 행보 속에 당시 러시아의 사회상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톨스토이의 사회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네흘류도프라는 귀족이 갱생과 의무의 길을 가게 되는 속에 반성처럼 드러나있다. 네흘류도프의 양심은 그 개인만의 것이 아니요 당시 제정사회의 병폐에 피해받는 모든 약자들을 위한 뼈아픈 가책이다. 그러한 절망 속에 네흘류도프는 끝까지 카츄샤를 버리지 않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라도 카츄샤를 도와주려고 한다. 우선 그녀를 타락케 하여 창녀를 만든 첫째 원인은 자신에게 있음을 네흘류도프는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사회 전체에 대한 인식으로 확산되고 종착역은 '사랑'이요,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어야 했다.

카츄샤는 말한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니 당신과 결혼할 수 없다고. 당신이 느끼는 양심의 가책은 꼭 당신 때문에 내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만은 않다고. 그러면서 폐병으로 죽어가는 한 정치범을 자신은 사랑한다고 그를 돌봐야한다고 말한다.

네흘류도프는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전 인류를 구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깨닫는다. 이 인류에의 구원은 사실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계율 다섯가지를 지켜 나가면서 천천히 가능한 것임을 결론짓는다.

그러나 네흘류도프의 마지막 다짐은 오히려 사실주의의 걸작, 부활과 약간은 동떨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이 다짐은 톨스토이즘의 정수라고도 볼 수 있는데 톨스토이즘은 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한 사회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그리스도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부활의 정신은 사회 속에서 사회를 이해하고 그를 기반으로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by 달빛부름 | 2008/12/01 12:24 | 일반소설 | 트랙백 | 덧글(0)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